가시리 여행

정선 민둥산

아모스 33 2008. 10. 9. 11:04
강원도 정선 민둥산

곱게 빗어내린 銀髮인득 억새의 물결
가을 햇살에 은빛 출렁… 내달 초까지 볼 수 있어


 
억새산행은 해질녘이 제격이다. 민둥산 정상 부근을 뒤덮은 억새가 가을햇살에 반사되면서 금ㆍ은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인다.

억새는 가을여행의 또 다른 테마이다. 단풍의 화려함을 이기진 못해도 은근하고 그윽한 매력이 있다. 단풍이 컬러사진이라면 억새는 빛 바랜 흑백사진이다. 세련된 맛은 없지만 흐린 기억 속에서 추억을 반추할 수 있는 매개체로는 제격이다.

흔히들 억새는 단풍이 질 때쯤 시작된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단풍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핀다. 반면 개화기간이 단풍보다 길다. 짧은 단풍 절정기에 맞춰 바쁘게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 내달 초까지가 만개시기이니 다소 여유가 있다.

단풍에 비해 억새명산은 그리 많지 않다. 경남 밀양의 사자평 일대, 전남 장흥의 천관산, 충남 홍성의 오서산 등이 대표적 명소로 꼽힌다.

민둥산 산행의 입구인 발구덕 마을의 고랭지채소밭.
반면 강원 정선의 민둥산은 이들 산에 비해 규모는 적어도 한 곳에 몰려 피기 때문에 해마다 이맘때면 억새로 장관을 이룬다.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 뜻밖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곳, 민둥산 억새산행의 매력이다. 대신 결코 만만하지는 않다는 단서가 붙는다.

민둥산을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은 발구덕이다. 해발 800m쯤에 위치한 마을이다. 정상의 높이가 1,119m이니 이 곳에서 300여m만 오르면 된다.

헌데 마을의 모습이 묘하다. 아래에서부터 정상까지 가파른 경사가 이어져야 하겠지만 마을에 이르러 깔때기처럼 푹 꺼져 버렸다.

발구덕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카르스트지형이다. 석회암 지반의 갈라진 틈 사이로 이산화탄소를 머금은 빗물이 스며들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을 녹여버렸다. 오랫동안 이어진 현상으로 곳곳에 푹 패인 웅덩이가 생겼다. 발구덕이라는 말도 여덟 개의 구덩이라는 뜻의 ‘팔구뎅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땅이 내려앉을 지 모른다는 한 주민의 말에 오금이 저려온다.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문을 열어두는 것이 자연인가 보다. 대체로 이런 지형에는 경작지가 많다. 지금도 고랭지농사가 한창이다. 밭에 심어둔 채소를 캐나가는 트럭의 왕래도 잦다. 만선의 어부가 항구로 돌아오면서 얼굴 가득 머금는 그런 미소를 그들의 눈에서 볼 수 있다.

발구덕에서 정상까지는 40분 가량. 그런데 처음부터 급경사의 연속이다. 한 발짝 떼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2~3분 오르고 허리 한번 편 뒤 뒤를 돌아다보는 일이 잦아진다. 뒤돌아 본 산에는 이미 단풍이 절정이다. 마주보고 선 산이 단풍과 억새로 출렁일 장면을 기대하며 이를 악물고 오른다.

20분 정도 오르니 억새가 보이기 시작한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지고 있다. 해질녘 가을햇살에 반짝이는 억새를 보기 위해 산행을 오후 늦게 시작한 탓이다. 그늘진 억새밭은 눈꽃으로 가득한 겨울산을 연상케한다. 산 능선에 다다르니 천지가 억새군락이다. 눈꽃인지, 목화솜인지 분간이 어렵다.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억새의 물결이 무려 14만평에 걸쳐 펼쳐진다. 억새가 크기도 웬만한 성인 키를 훌쩍 넘는다. 자칫 잘못 들어서면 길 잃기 십상이다. 출렁이는 억새물결에 따라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억새 속에 묻혀 힘겹게 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이다. 사방이 억새로 뒤덮였다. 억새를 제외한 나무들은 보기 힌든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불모의 산, 변변한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벌거벗은 민둥산으로 불리던 이 곳이 억새천국으로 변한 것은 불과 10여년 전. 정상에 드문드문 생겨난 억새를 주민들이 수시로 태우다 보니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억새밭은 마치 실력있는 이발사가 만들어낸 멋진 가르마를 연상시킨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볕에 역광으로 비치는 억새들이 황금빛 또는 은빛물결로 출렁인다. 화려하지 않으?아름답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짧은 등산길이 아쉽다면 하산길은 증산초등학교 방향으로 잡는다. 1시간30분 가량 걸리는 코스이다. 내리막의 연속이라 힘들지 않은데다 능선을 따라 내려가기 때문에 지루하지도 않다. 한 등산객이 이 길을 따라 서둘러 하산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르마길을 따라 내려가더니 억새속으로 사라졌다. 햇살을 받아 빛나던 억새의 반짝임도 함께 사라졌다.